[영주 부석사]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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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부

주도양 작가 Emptiness X

부석사와 관련된 기록이 많지 않아 창건 당시 구체적인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따르면 676년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창건 당시 부석사 일대의 여러 사찰을 흡수하였으며,
사찰이 위치한 태백산은 오악 가운데 하나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던 만큼 국가의 일정 지원을 바탕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존 유물 및 여러 상황을 종합했을 때 가장 번영하던 8세기~11세기 중반에 불상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 불상 도상

높이 2.75m 어깨 폭 1.24m에 이르는 이 불상은

불단 위에 단독으로 안치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다.

 

x-ray 조사 결과 보수의 흔적이 확인되었고, 이는 1376년 『봉황사부석사개연기』 기록과 일치한다.

이 외에도 여러 차례 복원한 사실이 문헌을 통해 확인되며, 현재 불상은 많은 부분에서 조성 당시의 원형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큰 머리에 넓적하고 풍만한 얼굴형을 지녔으며,

육계는 크고 높고 반원형 중간 계주가 있다.

나발에는 발제선이 촘촘하게 표현되어 있고, 눈썹과 눈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간 형태다.

 

이마는 백호가 있으며, 코 양옆으로는 팔자주름이 있다.

작은 코와 짧은 인중에 비해 입술은 도톰하고 길게 묘사되어 있다.

당당한 어깨와 튀어나온 가슴, 잘록한 허리는 건장해 보인다.

결가부좌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다리 폭이 넓고 양감이 풍부하여 튼튼해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얼굴과 몸의 비례가 다소 부자연스럽다.

대의가 신체에 밀착되어 몸매가 잘 드러나고 대의 자락은 바닥까지 길게 내려와 엉덩이와 허벅지 주변에 펼쳐져 있다.

옷 주름은 자연스럽게 표현했지만, 수가 많아 복잡하고 번잡하게 보인다.

(좌) 국보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부석사, 출처: 국가유산청 // (우)본존불,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출처:한석홍 기증자료

대의 깃은 옷 주름을 겹친 형태로, 석굴암 본존의 깃과 함께 범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으나,

전형적인 촉지인보다 짧게 표현되어 석가불이 아닌 다른 불상에서 나타나는 촉지인의 과도기적 모습으로 보인다.

 

이러한 도상의 변용은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의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상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하던 시기 장안에서는 촉지인 계통의 불상이 유행하였고, 신라는 아미타신앙이 유행하던 시기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주존불을 조성할 때 최신 도상을 반영함과 동시에 도상적 변형도 함께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목조로 만든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있으며,

화불을 부착한 흔적이 확인되나 현재 화불은 탈락한 상태다. 

여의두문, 당초문 등 문양이 매우 정교한 것으로 보아 후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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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서지민. 「浮石寺 無量壽殿 塑造佛坐像 硏究」. 『역사와 담론』 81. 2017. 쪽 149-205.
  • 이주민. 「영주 부석사 소조불좌상과 신라 화엄종 도상의 전파」. 『신라사학보』 29. 2013. 쪽 441-495.
  • 정성권. 「항마촉지인 불상의 신라 등장시기와 배경-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신라사학보』 59. 2023. 쪽 59-92.